전라남도 여수의 여행정보 총망라!
여수로 가기
전라남도 동쪽끝 여수반도에 자리잡은 여수는 삼면이 바다와 접해있어 접근하는 방법은 육로ㆍ해로ㆍ항공 등 다양하지만 실제로는 의외로 단순하고 선택의 폭이 좁다. 육로을 이용하여 여수로 들어오려면 꼭 통과하는 도시가 순천이다. 순천에서 17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이 사실상 유일하며, 철도의 경우에도 익산에서 호남선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전라선이 남원ㆍ구례ㆍ순천을 거쳐 종착역이 여수이다.
바다를 이용하는 방법은 남해 서상리나 제주에서 여수로 들어오는 배가 있을 뿐이고, 여수~남해~사천~통영~부산을 이어주던 쾌속선 엔젤호도 승객의 감소로 96년에 운항이 중지된 상태이다. 1972년에 처음 취항을 시작한 항공편은 현재 서울과 제주노선이 운행되고 있다. 결국 여수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여수반도의 입구에 자리잡은 순천을 통과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으며 여수와 순천간의 운명적인 연결은 지리적인 위치와 관련이 있다.
< 여수공항 > |
< 여객선 터미널 > |
위치상의 의미 여수
- 여수와 순천과의 관계
여수는 순천 땅에 매달리듯이 달려있다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은 여수와 순천과의 역사적 관계를 설명해주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고려 말 46년, 조선 영조 1년을 제외하고는 1897년 순천에서 떨어져 나올 때까지 줄 곳 순천에 편입되어 행정적인 통제를 받아왔다. 내륙의 행정중심지였던 순천에 비해 바다를 끼고있던 여수는 각종 특산물을 순천에 바치거나 어업에 주로 종사하면서 어느 정도의 멸시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종때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 전라좌수영이 설치되면서 내륙의 순천을 지켜주는 국토 방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조선 수군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각종 물자의 이동이 활발해지고 여수항이 개발되고 전라선이 부설되면서 순천에 비해 여수는 사람과 물자와 돈이 모여들게 되었고 1979년에 여천석유화학단지가 들어서면서 여수반도는 우리나라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다. 순천은 전통적인 도시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행정과 교육부분에 앞서고 있으며 여수는 새로운 항만공업도시로 산업과 교통부분에 앞서면서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통합되었던 지역으로서 현재 육로를 이용 순천을 거치지 않고는 여수로 접근하기가 어렵고 해상의 각종 물자의 이동 역시 여수를 거치지 않고서는 순천으로 올라가기 어려우므로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해주면 발전을 모색한다면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발전이 기대된다.
- 해상국립공원의 출발지/종착지
우리나라의 국립공원은 현재 18개가 있는데 이중 바다를 포함하거나 해안을 끼고 있는 국립공원은 한려해상ㆍ다도해ㆍ태안해안ㆍ변산반도 국립공원이다. 이중에서 해상국립공원으로는 한려해상과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2개뿐인 해상국립공원에 모두 속하는 지역이 바로 여수이다. 여수ㆍ오동도 지구는 한려해상국립공원에 돌산ㆍ여천 지구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다른 지역 같으면 하나의 국립공원만 있어도 지역의 자랑이며 관광산업의 출발이 될 수 있는데 아름다운 고장 여수는 2개의 해상국립공원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해안의 절경이 아름답고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 지역의 커다란 자원이기도 하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은 맑고 깨끗한 바다와 수많은 섬, 리아스식 해안으로 이루어진 빼어난 자연풍경을 가지고 있어, 1968년 12월 31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경남 하동군ㆍ남해군ㆍ사천시ㆍ통영시의 2도 4시 2군을 거치는 지역으로 남해지구, 거제ㆍ해금강지구, 통영ㆍ 한산지구, 여수ㆍ오동도지구 등 6개의 지구로 나누어져 넓게 분포한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은 많은 섬과 오랜 파도침식에 의한 해안의 각종 기암괴석들과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 무성한 난대성 식물이 어울려 뛰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다. 1981년 12월 23일 우리나라에서 14번째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전남 홍도에서 신안군ㆍ진도군ㆍ완도군ㆍ고흥군을 거쳐 여수시 돌산읍에 이르는 해안과 도서중심의 우리나라 최대의 국립공원이다. 돌산ㆍ여천지구는 여수시 돌산도의 남해안 일부와 금오도ㆍ안도ㆍ연도를 포함한 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해양과 도서관광이 주 기능으로 되어있으며 국토의 남단에 위치하여 접근성은 떨어지나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을 가지고 앞으로 우리나라 4계절 관광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곳이다.
- 교통의 종착점/출발점
여행자에 있어 시작과 끝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모든 것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는 것이다. 시작이 먼저이고 끝이 나중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시작과 곧 끝이요 끝이 곧 시작인 경우가 있다. 남해안의 반도에 위치한 여수는 도로나 철도교통의 시작이면서 끝이 된다.
어떤 것이 먼저인지는 어디를 중심을 보느냐에 달려있다. 여수에 살지 않은 필자로서는 우리국토의 중심에서 보면 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수인 들로서는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아무튼 좋다. 어떤 것이든 의미는 큰 것이니까!
여행자에게 철도는 남다르다. 묘한 향취와 느낌을 준다. 필자도 기차여행이 다른 어떤 여행보다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중의 하나이다. 여수로 향하는 철도는 전라선이다. 전라선은 길이 198.8㎞로 전라북도 익산에서 전라남도 여수에 이르는 노선이다.
1914년에 착공되어 1936년 12월 16일에 개통되었으며 익산에서 호남평야를 지나 전주를 거쳐 호남지방의 동부 산간지방인 임실ㆍ남원ㆍ곡성ㆍ구례ㆍ순천을 거쳐 여수반도를 동해안쪽으로 가로질러 여수반도의 끝 여수항에 도착한다. 호남지방의 기둥인 덕유산과 지리산을 지역을 지나면서 많은 관광객을 수송함은 물론이고 여수항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많은 화물을 처리하는 우리 국토의 남부지방의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중요한 철도이다. 전라선의 여수시 소라면 덕양역에서 여수시 삼일동 적량역 사이를 연결하는 철도노선이 갈라지는데 이것이 여천선이다.
길이 10.4㎞로 여천공단의 물자수송을 위해 1968년 4월에 착공하여 다음해 6월에 완공한 노선으로 현재 여객수송은 없고 여수국가산업단지에서 생산되는 각종 제품을 수송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공업제품운반 전용선이다. 이번 답사때 덕양역에서 여천선과 갈라지는 지점을 살펴보았는데 역에서 남쪽으로 약 100m정도 지점이었고 건널목이 하나 있었다. 역무원 아저씨의 위험하다는 만류에도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다가갔었다.
남들이 보면 별것도 아닌 일에 참으로 한심하다고 했을 듯 한데, 그래도 지리적으로는 의미 있는 지점이다. 종점인 적량역은 여천선의 끝이 아니고 계속해서 공장지대와 연결되는 철도가 부설되어있었다. 화물과 정유를 운반하는 많은 화차들이 국토의 내륙으로 들어갈 순서를 질서정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전라선과 여천선의 분기점> |
<덕양역> |
<적량역> |
- 17번 국도의 시작
남북방향의 도로를 상징하는 홀수로 끝나는 17번 도로는 여수시 돌산읍에서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에 이르는 길이 416.7㎞의 도로이다. 주요 통과지역은 여수시 돌산읍-순천시-곡성군- 남원시-임실군-전주시-완주군-충남 금산군-대전광역시-충북 청원군-청주시-진천군-경기도 안성시-용인시 양지면에서 영동고속도로와 만나면서 끝나게 된다. 여수-순천간의 주(主)도로라고 할 수 있는 17번 도로의 역사적 시작은 1910년 9월 일제에 의해 주민들을 동원한 연장 31.4㎞, 폭5m의 신작로에서 출발한다. 그 후 1973년 11월에 2차선 포장도로로, 1985년 12월 29일에 여천공단의 수출입화물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지금의 4차선 도로로 확장되었다.
돌산읍의 17번 국도가 시작되는 지점은 정확하지 않다. 주민들에게 물어보면 돌산읍사무소로 내려가는 길이 만나는 작은 삼거리가 시점이라고 하기도 하고 지도를 정확하게 보면 은적사 앞 돌산 향교를 지나 예고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의 정상이 출발점이라고 생각되기도 하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지도상의 지점이 맞을 듯 한데, 경남 남해군의 경우 3번ㆍ19번 국도의 시점에 대한 안내 표시판을 설치했었는데 이곳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어 아쉬웠다. 다만 읍사무소의 삼거리에서 10m정도 지나 여수가 37㎞남았으며 17번 국도라는 표지판이 작게 길가에 서있을 뿐이었다. 부근에 도로 확장공사가 행해지고 있어 안내판이 있었는데 임시로 철거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17번 도로의 시작 > |
< 17번 도로의 시작 > |
-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여수역
2001년에 일본 큐슈를 자전거로 일주했을 때 가고시마 남쪽의 일본 최남단 역에 들렸던 적이 있다. 역무원도 역의 건물도 없는 들판한가운데 있는 작은 간이역이었지만 일본 최남단 역이라는 흰색 기둥에 써있는 표지판이 서있었고 한참동안 일본의 최남단 역에 도착했다는 성취감에 여행의 고단함을 잊었던 적이 있다.
일본의 간이역은 아주 작아서 최남단 역의 의미를 더주었다고 생각되는데 우리나라의 최남단 역이 여수역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30년 12월 25일 광주-여수간의 열차개통에 맞추어 문을 열었으며, 당시 여수에서 일본의 나가사키까지의 정기선박항로의 취항으로 여수항의 발전과 함께 여수역은 남해안의 물류이동의 출발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재는 서울행 열차 14편과 목포행ㆍ익산행 각 1편씩 운행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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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여수역 > |
< 여수역 > |
충무공 이순신과 여수
여수를 답사하다보면 우리나라 남해안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을 다른 곳 보다 많이 볼 수 있고 임진왜란과 관련된 지명을 가진 곳도 많다. 이것은 이곳 여수가 외부로 노출된 해안지역의 위치적 특성으로 인해서 고려말부터 많은 왜구들이 이 지역에 출몰해서 약탈을 일삼아 수군의 기지로 부각되는 역사성과 관련 있다. 이에 여수는 조선 성종 10년(1479)에 전라좌수영으로 승격되어 고종 32년(1895)에 없어지기까지 400여년 동안 남해안 방어의 중심지로 국방상의 중요한 임무를 맞게 된다.
특히 임진왜란의 전쟁 중에 경상도 수군이 거의 자멸의 지경에 처해있을 때 이곳에 일찍 부임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전 대비로 이 지역은 왜적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었으며, 선조 24년(1591)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전쟁을 준비하고, 이곳을 중심기지로 이순신 장군의 지휘 하에 경상도 지역에 출병하여 왜적의 수군을 격파하며, 전쟁 이후에는 삼도(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수군통제사를 겸하면서 여수는 삼도수군통제의 중심이 된다.
스위스의 경우 스위스를 구한 월리암텔의 이름을 딴 탐방루트를 정해놓고 많은 청소년들과 관광객이 그 루트를 돌아보면서 스위스 독립정신을 생각해보는데, 우리나라도 남해안 전역에 널려있는 이순신 장군의 유적을 정비해서 충무공 루트를 만들어 청소년들의 학습의 장으로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여수지역에 산재해 있는 충무공과 관련된 유적을 중심으로 여수내의 충무공 루트를 찾아가 보자.
- 충무공 루트
진남관 → 좌수영대첩비/타루비 → 자산공원 → 충민사/석천사 → 무술목 → 이충무공 자당 기거지 → 오충사 → 무술목
- 진남관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했을 때 전라좌수영이 있던 자리에 지금 남아있는 흔적은 진남관(鎭南館)이다. 이 일대를 중심으로 전라좌수영의 성곽이 있었을 텐데 지금 그 흔적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조선 후기에 전라좌수영 내에는 600여 칸으로 된 78동의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진남관이 유일하다. 진남관은 돌산대교를 건너 돌산공원에서 여수시 전경을 바라보면 뒤에 종고산을 배경으로 한가운데 압도적인 모습의 대형 건축물이 눈에 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전라좌수영의 중심건물인 진해루(鎭海樓)가 들어서 있었다고 하는데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리고 지금의 진남관은 선조32년(1599)에 새로 지었다가 그 후 화재로 소실되는 등 여러 차례 증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은 당시 임금이 사용하던 궁궐을 제외하고 지방에 세워진 목조건축물 중 가장 큰 건물로 우리나라 고건축물 중 바닥면적이 가장 큰 건물로 알려져있다.
중앙동로타리에서 진남관을 향해 올라가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망해루(望海樓)라는 건물인데 원래 전라좌수영의 문루역할을 했던 건물이지만 일제시대에 철거된 후 1991년 새롭게 지었다고 한다. 망해루에서 계단을 올라가 문으로 들어서면 웅장한 건축물인 진남관을 마주하게 된다. 둘레가 2.4m의 기둥이 68개가되고 전체 건물길이만도 75m에 높이가 14m의 초대형 건물이다. 그 웅장함에 이곳이 전라좌수영의 지휘본부 건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을 영접하는 객사(客舍)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여수 앞 바다와 돌산대교의 모습을 보면 이곳에서 지휘하던 이순신 장군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 건물이 전라좌수영의 지휘본부 건물이었다고 상상해본다. 마당을 지나 입구의 울타리 옆에 여수 돌 사람(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이 서있는데, 여수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돌장승(벅수)이다. 충무공은 이런 돌 사람을 곳곳에 세워 적을 교란시켰다고 하고 7개를 세웠는데 현재는 이것만이 남아있다. 외로워 보이고 바다를 향하지 않고 건물을 쳐다보는 모습이 어색하다. 조선말기에는 여수 공립보통학교로 이용되었고, 일제시대는 여수중학교와 야간상업중학교로 사용되다가 해방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며 국보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
< 진남관 > |
< 진남관 내부 > |
< 망해루 > |
< 벅수 > |
- 좌수영대첩비
진남관에서 여수경찰서 방향의 언덕을 올라서면 건널목이 보이고 옆에 작은 표지판이 좌수영대첩비라고 쓴 화살표가 보인다. 그곳에서 비탈길을 올라가면 석축이 쌓인 기와지붕이 보이는데 돌아서면 좌수영대첩비와 타루비가 나란히 들어있는 비각이 있다.
이곳은 고소대(姑蘇臺)가 있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작전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 8경의 하나로 옛날에는 고소정(姑蘇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고 작은 정원에 오래된 느티나무와 몇 그루의 동백이 지키고 있다. 비각 안에는 좌수영대첩비(左水營大捷碑)가 가운데 놓여있고 왼쪽에 동령소갈비(東嶺小喝碑), 오른쪽에 타루비(墮淚碑)가 놓여있다.
거북받침에 뿔달린 용이 새겨져있는 지붕과 그 위에 연꽃봉우리가 있는 높이 3.05m 폭1.24m의 좌수영대첩비는 국내 비석 중에 최대로, 옥포ㆍ노량ㆍ한산ㆍ명량 등지에서 활약한 이순신 장군의 행적과 활약이 기록되어있다. 비에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고 기록되어있는데 보통 충무공대첩비, 좌수영대첩비 등으로 불려진다. 타루비는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후 6년이 지난 1603년에 부하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서 세운 비로 비문에 중국 양양 사람들이 양호 장군의 덕을 생각하여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뜻을 취해 타루비라 명명했다고 써있다.
옆의 좌수영대첩비에 비해 작고 초라해 보이지만 생사를 함께 했던 그의 부하들이 만들어준 비석으로 작지만 그들의 힘이 느껴지는 오히려 당당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두비석 모두 보물 제1288호로 지정되어있다. 이곳 고소대에서 바라보는 여수항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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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산 공원
좌수영대첩비에서 중앙초등학교로 내려와 오동도 방향으로 가는 길에 오른쪽 산의 정상부에 위치한 공원이 자산(紫山)공원이다. 자산이라는 이름은 일출 때 산봉우리가 아름다운 자색으로 물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은 충무공과 큰 관련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국내에서 가장 큰 충무공 동상이 있는 곳이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서울의 한폭판까지 우리나라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충무공 동상이지만 이곳에서 보는 충무공 동상은 남다르다. 동상 자체의 조형미나 엄숙미는 떨어지지만 이곳이 충무공이 활약한 여수에 서있다는데 의미를 두고 이곳에 올라 여수앞바다 일대를 바라보면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자산공원 | |
- 충민사/석천사
여수역에서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하는 도로를 달리다 중앙여고 앞 3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마래산 아래 충민사가 위치한다. 멀리 여수 신항과 오동도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항복이 왕명을 받아 통제사 이시언에게 명하여 건립한 곳으로 선조가 직접 이름이 짓고 현판을 내린 충무공과 관련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당이다.
경남 남해 노량의 충렬사보다는 62년, 아산의 현충사보다는 103년 먼저 세워진 사당으로 의미가 있다. 옆에 있는 석천사는 충무공의 영을 모신 사찰로 승병으로 활약하여 큰 역할을 한 옥형대사와 자운선사가 충무공 사후 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제당을 만들고 암자를 건립했다고 한다. |
여순 사건을 찾아서
여수하면 아름다운 자연과 공업단지도 생각나지만 우리세대는 잘 모르는 막연한 일이 여수순천반란사건이다. 이 사건은 우리민족역사에 6ㆍ25, 제주도 4ㆍ3사건과 같은 맥락의 이념적인 갈등에 의한 사건으로 우리의 아픔이다. 1948년 10월11일 여수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국군 제14연대는 정부의 제주도 4ㆍ3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친일파 척결과 분단정권반대를 주장하면서 거부하자 정부의 진압군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양민들 2,500여명이 숨진 민족의 비극적인 사건이다. 명령을 거부한 반란군은 경찰서와 관공서 등 여수시내를 장악하고 순천을 거쳐 광양ㆍ곡성ㆍ구례ㆍ벌교ㆍ고흥 등 전라남도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해 나갔다.
초기에 진압군에 밀린 정부군은 5개 연대를 투입하여 박격포와 장갑차, 경비정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여수와 순천지구를 탈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은 사상적으로 맞지 않는 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처형하고 진압군은 반란군에 동조하거나 혹은 자세한 동조여부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민간인을 처형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사건의 비극은 같은 지역에서 생활하든 사람들간에 반란군의 세력하에서 혹은 진압군의 세력하에서 서로를 반대자로 지목하면서 쉽게 그들의 자유와 목숨을 억압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지역사회의 기반인 공동체의식이 무너지고 일반시민의 마음이 분열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이 이 지역의 문제라기 보다는 당시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 파생되었다고 생각되며, 50여 년이 지난 지금 서로의 상처는 아문 듯 보이지만 사건의 실체에 대한 규명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다음세대에게도 커다란 짐을 지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여순 사건의 현장 찾아가기
ㆍ대판동 사거리(현 중앙동 로터리) : 1948년 10월 23일 인민재판이 열려 주요 우익인사 처형 ㆍ신월동 : 국방경비대 제 14연대 주둔지 ㆍ종산초등학교(현 중앙초등학교) : 1948년 10월말에서 12월 초순까지 여순 사건 당시 가장 많은 학살이 일어난 곳 ㆍ만성리굴 앞 : 1948년 11월 많은 수의 인명을 처음을 집단학살한곳 ㆍ서국민학교(현 여수서초등학교) : 진압군의 본부위치 ㆍ호명동 야산 :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된 부역자나 적극 가담자 100여명을 사살한 곳
여수 돌아보기
- 율촌의 장천교회
순천에서 4차선으로 잘 확장된 17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면 해룡면의 4거리를 지나자 곧 율촌으로 들어선다. 율촌면의 면사무소를 지나 작은 언덕을 넘다보면 보이는 큰 교회가 장천교회(長川敎會)다. 장천교회는 1905년 10월 전남동부지방의 4시 4군(여수ㆍ여천ㆍ순천ㆍ광양ㆍ고흥ㆍ보성ㆍ구례ㆍ곡성)에서 제일 먼저 설립된 교회로 이들 지역의 모교회(母敎會)가 된다.
건립당시에는 목조 초가 12평이었고, 1912년에는 사설 여흥학교(麗興學校)가 개설되어 율촌관내의 근대학교가 시작된 곳이다. 이 학교는 1935년에 국어를 폐지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불응하여 개교한지 23년 후 자진 폐교하게된다.
우리가 답사를 다니다 보면 많은 절을 유적으로 방문하게 되는데 율촌의 장천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문화적인 가치를 지닌 장소라고 생각된다. |
< 장천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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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촌면소재지의 이동으로 희비가 엇갈린 득실과 여흥리
남조선철도회사가 여수-광주간 철도공사를 하면서 율촌지역에 기차역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있던 득실마을을 역 위치로 선정 설계에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동교ㆍ장천ㆍ사항 주민들이 율촌면과 해룡면의 주민들이 이용하기 편리하고, 역을 건립하는데 부지확보와 공사비 절감면에서 유리한 신정(현 여흥리)으로 변경하도록 건의하여 결국 역의 위치가 득실마을에서 현재의 위치로 변경되었다. 그에 따라 득실마을은 현재 한적한 어촌마을로 변화되었고 율촌역을 중심으로 한 여흥리는 면소재지로서 발전해왔다.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철도교통수단에 의해서 지역의 발전 방향이 변하는 경우는 공주→대전, 의주→신의주, 태인→신태인, 경기 광주 유양리→의정부 등 여러 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현재 득실마을에는 과거의 흔적은 거의 없으며 면사무소 직원에 의하면 득실마을의 주민회관이 면사무소 자리였다고 하는데 마을 주민은 그곳이 아닌 옆의 일반 가옥이 면사무소였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기차길 건너 넓은 밭이 초등 학교가 있던 자리라고 마을주민이 이야기해준다.
< 득실마을 > |
< 득실마을 마을회관 > |
< 율촌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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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와 나환자의 성지(聖地) 애양원
이번 답사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지금까지 여러 번 여수지역을 여행하면서 처음으로 들려본 애양원이었다.
율촌에서 취적리를 지나면 왼쪽으로 바다를 끼고있는 여수공항을 만나게된다. 취적리(吹笛里)는 피리를 분다는 뜻인데 앞에 비행장이 생길 것을 예상했는지 피리소리대신 비행기의 이착륙소리가 피리소리를 대신하고 있다.
비행장으로 들어서 현재 활주로 확장공사를 하고있는 공사장을 우회하는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애양원 때문에 생겨난 신흥마을이 있고 옆에 애양원이 있다. 마을 뒤편으로 도성마을과 연결되는 이곳은 1904년에 미국인 목사이면서
의사였던 오웬(Clement C.Owen)이 전라남도 동부지역을 맡아 선교에 전념하다 폐렴으로 순교하는데 그를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활동하던 의사 포사이트(Wiley H.Forsythe)가 광주로 가던 중 남평 부근에서 길가에 버려진 여자 한센병 환자를 발견하게 되고 나중에 그를 데리고와서 돌보게 된다.
이 환자에 대한 치료는 우리나라에서 서양의학으로 한센병을 최초로 치료한 시작이었으며, 그 후 치료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숨지자 윌슨(RobertM.Wilson)은 광주인근의 봉선리에 집을 짓고 한센병환자 20명을 치료하기 시작하고 나주에 1928년 600명의 환자가 이곳으로 옮긴 후 애양원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다.
애양원(愛養院)이라는 뜻은 서로 사랑하고 도와가며 살아가자는 뜻의 '사랑의 동산'이란 뜻으로 한센병환자를 신앙적으로 돌보는 병원과 교회, 거주지가 생겨나게 된다.
애양원교회의 손양원 목사는 일제에 항거하기도 하다가 6ㆍ25전쟁당시 신앙을 지키며 공산군에게 대항하다 애양원 환자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지금 애양원에는 한센병을 치료하는 사회복지법인 애양원과 정형외과ㆍ피부과ㆍ마취통증과ㆍ내과가 개설된 애양병원, 애양원 교외, 노인 한센병환자를 위한 애양평안요양소, 야양재활직업보도소 등이 있다.
병원을 지나 성산교회(애양원 교회)로 가보면 현대식 병원이 세워지기 전까지 병원보관이었던 건물을 각종 치료기구와 사진 등을 전시해놓은 애양원 역사박물관은 인상적이었다.
입구에는 초창기 한센병 환자가 거주했던 주택도 남아있고 도성마을로 향해 바닷가 구릉지에 가면 순교자 묘지와 손양원 목사의 순교기념관도 잘 정비가 되어있다.
애양원 뒤에 있는 도성마을은 치유된 한센병 환자들의 재활과 정착을 돕기 위해 1976년에 조성된 마을로 도성농원이란 집단을 조직하여 공동생활방식을 생활하는 특수지역이다.
주로 축산업에 종사하면서 살아가는데 애양원에 들어서면 가축의 분뇨냄새가 많이 나는데 이 마을의 영향이다. 주변이 바다로 둘러쌓여있고 앞에 작은 섬과 광양만, 여수산업단지가 보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마을로서 고흥의 소록도와 함께 한센병환자들의 삶고 어려움을 확인해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 애양평안요양소에는 110여명의 노인환자가 기거하고있다고 한다.
- 여수의 희망 여수국가산업단지
여수공항을 지나 덕양을 지나면 왼쪽으로 거대한 장치가 늘어선 여수국가산업단지가 나타난다. 이곳 해안에서 여수반도의 오른쪽 끝인 낙포동 일대까지 석유화학산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단지가 들어서 있다.
여천석유화학단지라고 불리다가 2001년에 여수국가산업단지로 명칭을 변경했는데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에 의해 1967년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약 900만평의 부지에서 149개회사에 12,230명의 종업원이 일하고 있다.
주요 공업은 정유와 비료, 석유화학이며, 화력발전소 2개와 12개 부두의 항만시설, 주암댐과 수어댐에서 공급되는 공업용수 등 산업의 기반시설이 잘 갖추어진 공업지역이다.
과거 배안으로 고기들이 뛰어들어올 정도로 황금 어장이었던 이곳에 천지가 개벽할만한 변화가 일어나 주민들은 대부분 구여천 시가지 이역으로 이주했고 거대한 공장들이 들어서 국가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지역경제의 발전과 지역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등의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성장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도 커다란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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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양원 본관>
< 선교사 비>
< 기념관과 내부>
< 기념관과 내부>
< 기념관과 내부>
< 애양원 교회>
< 애양평안요양소>
< 구 한센병 환자 거주지>
< 도전마을>
< 손양원목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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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비가오는날 이곳 두암의 한마을을 방문했었는데 한집에 들어서자 모기살충제 냄새가 나서 주인에게 모기약을 뿌렸냐고 했더니 뿌리지 않았는데 오는 사람들마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며 그렇게 냄새가 나냐고 했었다.
짧은 시간 그곳에 있었지만 강한 냄새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이곳에 사는 주민은 익숙해져 잘 모르겠다니 주민들의 고통이 느껴졌다.
개발과 환경보전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없지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연적인 물음이고 그 해결을 위해 모두다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여수산업단지 > |
< 여수산업단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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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산업단지 > |
< 여수산업단지내 발전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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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업단지 속의 생명원 영취산 흥국사
여수산업단지만 둘러보면 즐거움을 찾는 관광객에게는 산업시설과 공해만 있는 곳으로 생각되지만 그 중심에 생명을 불어넣고 문화적 감흥을 주는 영취산과 고찰 흥국사가 있다. 진달래로 아름다운 영취산은 높아 보이지(510m) 않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산으로 공업단지 옆의 평범한 산이지만, 4월에 진달래가 피면 창녕의 황왕산과 마산의 무악산과 함께 남한의 3대 진달래 명산으로 손꼽힌다.
그 곳에는 '국가의 부흥과 백성의 안위를 기원하기 위해 경관이 좋은 이곳에 절을 세우고,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나라가 흥하면 이 절이 흥한다'는 설립취지를 가진 천년고찰 흥국사가 자리한다. 이 정도의 절이라면 다른 지역에선 커다란 산의 깊은 산중에 자리잡았을 절이라고 생각되지만 흥국사는 그냥 손쉽게 다가갈 수 있는 친숙해 보이는 절이라 더욱 좋다.
고려 명종25년(1195)에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했으며 임진왜란당시 해군에 소속된 승군(僧軍)이 활동했던 중심지로 최고 700여명의 승군이 산 너머 여수의 전라좌수영과 합동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곳이다. 소박한 경내에 승군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다른 절과 다른 의미를 가지면서 보물급 문화재가 산재한 내실 있는 절이다. 공업단지속의 섬같은 삼일면소재지를 지나 하천의 길을 따라 가면 절 아래 유원지화 된 마을인 작은 사하촌(寺下村)이 나타나며 약간은 썰렁해 보인다.
이곳에서 절에 들어가기 전에 하천을 건너는 돌다리가 오른쪽에 보이는데 보물 563호로 지정된 무지개다리 홍교다. 선암사의 아름다운 승선교와 같은 모양이지만 길이40m 높이5.5m 폭11.3m로 현존하는 무지개다리로서는 가장 크다. 조선 인조17년(1639)에 건조된 다리로 다리자체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견고함이 보이는 외형이 든든해 보인다. 일주문을 지나 길을 걸어 올라가면 넓은 터에 절이 자리잡았는데 먼저 2층의 봉황루가 모습을 드러내고 이곳을 지나면 보물 396호의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다. 세칸의 건물에 지붕이 높아 훤칠한 모습인 대웅전은 질서 있게 규칙적으로 모양 되어진 문살이 인상적이며 약간 바랜 듯한 단청이 이 절의 역사와 모습을 말해준다.
대웅전 안에는 보물 578호의 후불탱화와 괘불, 수월백의관음 벽화 등의 문화재가 많으며, 밖에는 대웅전 오른편에 거북이 받치고 있는 석등과 뒤로 불조전, 팔상전, 원통전이 배치되어있다. 처음 흥국사를 방문했을 때 공업단지 안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을 생각지 못했으며, 절을 돌아보고 다시 공업단지로 나왔을 때 만났을 때 영취산과 흥국사가 있기에 여수산업단지는 황량한 벌판에 경제적 이익만 보고 세운 다른 공업단지와 구별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 홍교 > |
< 봉황루 > |
< 대웅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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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등 > |
< 대웅전 문 > |
< 흥국사 전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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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의 얼굴 오동도 그리고 방파제로 구분된 여수항
어느 지역이나 그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있는데 여수를 대표하는 장소로는 누구나 오동도를 떠올린다. 필자가 이곳을 이번 달의 답사장소로 정한 가장 큰이유도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에 오동도에 피어있는 동백이 생각나서이다. 이번 답사 중에는 여러 번 가본 오동도를 제일 나중에 찾았는데 아쉽게도 너무 늦은 시간에 방문해서 입구만 돌아보고 왔다. 아직 동백이 만개하지는 않았지만 추운 겨울 속에서 만나보는 여수 오동도의 동백은 어려움 끝에 희망이 온다는 상징성을 준다.
면적 0.12㎢, 14㎞의 해안선을 가진 작은 섬으로, 1933년 768m의 방파제가 건설되면서 인위적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다. 멀리서 섬의 모습이 오동잎처럼 보이고 옛날에는 오동나무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오동도라 불려왔는데, 지금 오동나무는 사라지고 동백나무를 중심으로 팽나무ㆍ소태나무ㆍ후박나무ㆍ참식나무ㆍ팽나무ㆍ쥐똥나무ㆍ돈나무 등 이름도 생소한 160여종의 아열대성 상록활엽수가 사시사철 푸른빛을 발휘하는 이국적인 섬이다. 섬의 동쪽 먼 바다 쪽으로는 파도에 의해서 형성된 소라바위ㆍ병풍바위ㆍ지붕바위ㆍ코끼리바위ㆍ용굴 등으로 불리는 기암절벽이 형성되어있으며 안쪽에는 상가와 유람선 선착장이 위치한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수군의 연병장을 만들고 군사들을 훈련했으며 이곳에 많은 시누대를 이용해서 화살을 만들어 왜군과의 전쟁에 사용했다고 한다. 섬 안에는 학생들의 학습장으로 활용될 수 있는 식물원과 높이 10.5m의 등대, 잔디광장이 있으며 섬 안 곳곳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산책로를 따라 구석구석 돌아보면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는 곳이다.
섬을 한눈에 살펴보려면 입구 오른쪽에 자산공원으로 올라가는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주변 바다와 돌산섬, 여수역, 여수신항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풍광이 아름다워 이 일대는 1968년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69년에는 관광지로 지정되어 오늘날에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오동도 방파제 공사는 일제에 의해 남해 선구해안에서 자갈을 가져다 큰배가 접안 할 수 있는 남해안의 중심항구로 만들기 위해 시작하였다. 이 방파제의 완공과 함께 여수항은 돌산도를 천연의 방파제로 삼아 전라좌수영의 중심이었으며 배후에 여수시가지를 가진 지금은 연안여객선의 기항지 구항(舊港)과 전라선 철도의 종점으로 부두와 대형 항구접안시설이 잘 갖추어진 신항(新港)이 있다.
오동도 안쪽에 위치한 신항은 세관과 검역소, 해운국의 시설이 있고 해방 전에는 부산에 이어 남해안에서 제2의 항구로 중요시되었으나 근래에 들어와 배후지가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해 울산이나 마산에도 뒤지는 항구가 되었다.
< 여수항 > |
< 오동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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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의 다리들
여수지역에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내세울만한 다리가 3개가 있다. 돌산읍 구 죽포리사무소 앞에 만제석교가 있다. 돌산읍지에 의하면 <여산지>에 이 다리를 마주교(馬柱橋)라 했는데 1966년에 박원진ㆍ정창신ㆍ박도옥ㆍ서재태 등 건립비에 관계된 4명의 이름이 나온다. 지금 이 다리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죽리만제석교(竹里萬載石橋)가 세워졌다. 80년대 초까지 다리의 일부가 남아있었으나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너무나 황당하였다.
남아있는 것은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에 길이 5m, 너비 0.7m의 돌 4개만이 땅에 박혀 있어 한참동안 다리라는 개념을 가지고 주변을 돌아보다 근처를 지나가는 노인 분에게 이야기를 듣고 알 수 있었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죽포리를 대표하는 2가지가 석교와 마을입구에 있는 큰 거목이 있는 작은 동산인데, 석교는 사라져 저 모양이고 거목은 태풍으로 죽어가 마을의 대표가 모두 사라져 안타깝다고 했다.
필자로서는 마을의 입장에서 본 안타까움 보다 여수전체로서도 아쉬운 점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다리 옆 주민이 세워놓은 안내판에 써있듯 1006년에 만들어진 모습대로 지금의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가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 보다 왠지 모를 안타까움에 어둠 속에 여수시내로 돌아오면서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또 다른 다리는 이전에 언급한 흥국사의 돌다리 홍교다. 계곡 양쪽을 기반으로 무지개 혹은 시위를 당기는 활모양을 한 다리로 잘 다듬은 86개의 장대석을 각이 지게 짜 올려져 반원을 이뤄 수학적인 힘의 균형을 맞춘 절묘한 구성이다. 다리의 중심 아래에 용머리를 새겨 돌출 시켜 실용성과 예술성을 첨가한 옛사람의 풍취를 느낄 수 있다. 직선으로 이루어져 현대의 다리와 달리 곡선으로 이루어져 부드러움과 친숙함과 어딘가 모를 위엄을 주는 홍교는 여수지역 다리의 절정이다.
최근에 돌산과 여수시를 연결한 돌산대교는 현대적인 아름다움과 실용성이 합쳐진 다리로서 우리나라에서 7번째의 크기로 2만 여명이 살던 큰 섬의 교통불편과 산업의 낙후를 단번에 바꾸어 놓았다. 다리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여수시 종화동에서 돌산 우두리까지 도선(渡船)을 이용하여 왕래하였고, 우두리에서 군내까지는 좁은 도로로 연결되어 교통의 불편함은 이 지역 주민의 생활도 궁핍하게 만들었다.
1981년 지역주민의 열망과 건의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어 1984년 12월 15일에 여수시 봉산동 당머리에서 여천군 돌산읍 우두리까지 연장 450m, 폭11.7m의 다리가 개설되었다.
여수항으로 드나드는 대형선박의 통항과 빠른 조류를 극복하기 위해 양쪽해안에 강철교탑을 세우고 케이블 28개로 다리를 묶어 지탱하는 사장교로 만들어졌으며, 수면 위에서 다리높이가 20m나 되어 다리를 걸어서 건너보면 주변경치의 아름답지만 바람이 불때면 짜릿한 긴장감도 느낄 수 있다.
섬과 육지를 연결해주는 연륙교는 섬 사람들에게는 기후나 일몰로 도선이 끊어지는 교통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육지 사람들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섬을 쉽게 갈 수 있다는 좋은 점을 주면서, 물자이동의 편리함으로 양쪽 지역의 산업이 발달하는 좋은 점을 가져다 준다.
오늘날 여수에서 돌산지역이 빠졌다고 생각하면 한쪽날개를 잃어버린 새처럼 허전함과 생존의 어려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된다. 돌산대교는 모든 곳에서 보아도 아름답지만 특히 돌산공원에서 내려다보면 남성적인 웅장함을 주고, 은은한 불빛으로 휘감은 야간의 경치는 여성적인 아련한 아름다움을 준다.
< 죽포다리 > |
< 죽포다리 > |
< 죽포 다리옆 비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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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산대교 > |
< 우두리 선착장 > |
< 돌산-여수 도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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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는 경치와 향일암
< 향일암과 바다 >
< 관음전 >
< 대웅전 >
< 바위 일주문 >
< 거북등 모양의 바위 >
< 금오산 정상 >
< 대웅전에서 본 거북 머리모양 형상 >
< 임포 >
< 대간첩작전 승전비>
< 북한 반잠수정 전시관 >
< 반잠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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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일암이 위치한 임포마을 일대는 향일암으로 이름이 났지만, 이곳의 자연환경이 너무나 뛰어나 향일암이 유명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향일암은 돌산에서도 가장 끝에 위치한 암자로 신라 선덕여왕 13년(644)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원통함이라 칭하다가,
고려때 윤필거사가 금오암으로 개칭하고, 조선 숙종41년(1715) 인묵대사가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향일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최근 영구암이라 경봉스님이 개칭하여 부르기도 한다.
원통암ㆍ금오암ㆍ향일암ㆍ영구암 등 이름도 다양하지만 금오산 기슭에 있어 금오암(金鰲庵), 일출을 잘 볼 수 있어 향일암(向日庵), 이곳의 형상이 거북이 형상에다 뒤에 위치한 금오산으로 오르는 도중의 바위 대부분이 마치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어 거북이의 영이 서린 영구암(靈龜庵)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름이야 어떻든 이곳에 가면 남해 금산 보리암처럼 저절로 자연의 조화에 마음이 숙여지는 기도처로서 느껴지는데, 양양 낙산사의 홍연암ㆍ남해 금산의 보리암ㆍ강화도 보문암과 함께 우리나라 4대 기도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주차장에서 걸어가거나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작은 포구마을에서 돌산섬 최고의 관광마을로 떠오르는 임포에 도착한다.
오른쪽으로 급경사의 길을 힘들게 올라 향일암을 향하게 되는데 지금은 입구에 계단을 만들고 일주문을 만들었지만 원래는 일주문이 없었으며 암자 밑의 거대한 바위틈이 일주문을 대신했다.
대웅전 앞에 이르면 임포일대와 앞바다가 눈에 거침이 없으며, 이곳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임포가 거북이 머리가 되고 공원관리공단의 주차장이 왼쪽 다리 그리고 한쪽다리는 물에 잠겨있어 거북이 막 바다로 들어가는 형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대웅전에서 좀더 올라가면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관음전이 나오고 대웅전에서 내려와 차가 올라올 정도의 넓은 길을 내려가다 보면 금오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다.
이 길을 따라 20여분정도 산을 오르면 가파르지만 바다를 끼고 있는 주변의 경치에 힘든 줄 모르고 도중의 바위에는 참으로 신기하게 거북이 등처럼 무늬가 생겨 결국 거북이 등을 올라가게 된다. 정상에서는 주변일대가 장쾌하게 다가오며 멀리 고흥과 화정면의 많은 섬들, 남해의 푸른 바다가 눈이 시리도록 들어온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전국에서 손꼽혀 매년 1월1일이면 향일암 일출제가 열린다. 일출 못지 않게 금오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더욱 장관인데,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고 서해가 아닌 곳에서 일몰을 볼 수 있어 더욱 의미 있다.
결국 이곳의 자연은 너무나 완벽하지만 그 완벽에 마지막 점을 찍은 것은 결국 향일암이다. 향일암 없는 이곳의 풍경은 여느 바닷가 풍경과 비슷하고 이런 풍경 없는 향일암은 여느 암자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두 개의 완벽한 조화라고 생각된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이곳은 바닷가인데도 바람에 염분이 없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고, 다만 아쉬운 점은 거북의 목이 되는 임포마을의 주차장과 머리부분에 위치한 군초소, 왼쪽다리부분에 해당하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넓은 주차장이 눈에 거슬린다.
더 이상의 개발은 오히려 이곳으로 보아서는 손해라고 생각된다. 그래도 이곳의 군인들이 1998년 12월 17일 침투하던 북한의 반잠수정을 발견하고 격침하게 되었으니 여수항으로 들어오는 이곳은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지금 이 반잠수정은 인근의 율림리의 폐교된 초등학교에 전시되어있다. 임포마을의 가계마다 직접 돌산갓김치를 담가 파는 모습 또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 재미있는 지형의 성두마을의 타포니
돌산의 최남단마을인 성두마을은 인상적이다. 돌산의 끝에 있다는 것과 마을의 모습이 포구를 감쌓은 주변의 금오산자락으로 조금도 더 이상 나갈 곳이 없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이곳에서 금오산 자락을 넘어 율림리까지 도로가 포장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도 마을 뒤로는 높은 산과 바위가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않은 그야말로 절해고도의 생각이 드는 곳이다.
이곳에 가면 바닷가에 바위들이 딱딱한 고체가 아닌 부드러운 생크림의 거품이 빠진 듯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지형학적으로 타포니(tafoni)라는 지형이다.
풍화혈(風化穴)이라고도 하는 이 지형은 말 그대로 풍화작용에 의해 구멍이 생긴 것인데 보통 건조한 지형에서 화학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곳의 풍화는 바닷가에 위치하여 염류에 의한 풍화에 의해 만들어진 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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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에 녹아있는 각종 염류가 암석에 닿으면 마를 때 암석사이나 광물사이에 틈으로 들어가 결정체가 되면서 쐐기의 작용으로 간격을 넓히게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암석을 부수게 된다. 또한 바위 가운데 있었던 자갈류가 파도의 침식 등에 의해 빠져나간 후 염분 등에 의해 계속 풍화되어 형성된 것으로도 생각된다.
우리가 보통 파도에 의해서 깎인 바위는 직선형의 기암괴석을 생각하게 되지만 이곳 성두마을을 감싸고 있는 바위는 부드러운 곡선의 운치가 드는 바위로 돌산의 최남단이라는 지정학적인 의미와 지리적인 의미가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 성두마을 > |
< 성두마을의 타포니 > |
< 성두마을의 타포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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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수의 대비 은적암
성두마을을 지나 1950년에 미군 폭격사건이 있었던 횡간도를 바라보며 해안도로를 달리면 돌산향교를 만나게 된다. 그 옆에 작은 어린이집이 있는 사이로 뒷산을 바라보면 천왕산 아래 짙은 숲이 보이는데 그 안에 은적암이 있다.
절 앞까지 차가 들어가 입구 주차장에서 내리면 울창한 소나무와 난대림으로 둘러싸인 작고 아담한 절이 나온다. 1975년에 전라남도 지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이곳은 고려 명종 2년(1172)에 보조국사가 금오도에 사찰을 건립하고 송광사라 하였으며, 송광사와 순천 선암사를 왕래하는 중간 휴식처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암자 뒤편에 있는 거대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쌓여있고 앞에 보이는 바다의 풍경이 조용하고 아름다워 은적암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풍수지리적으로 이곳 주변의 형국이 호랑이가 숨어있는 형상이고, 앞에 위치한 화정면의 개도는 개(犬)의 형상으로 호랑이와 개는 서로 상극이라 그것을 상쇠하기 위해 나무를 많이 심어야 한다고 해서 이곳에는 소나무와 후박, 동백나무 등 많은 숲이 잘 조성되어있다.
숲에 들어서면 대낮에도 캄캄할 정도로 숲이 깊은데 비록 작은 규모의 숲이고 절이지만 도로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 평범한 돌산의 들길을 걸어 은적사를 방문해 뒤의 산에 올라 절과 먼바다를 바라보면 좋을 듯 하다.
< 대횡간도 > |
< 돌산향교 > |
< 은적암 마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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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적암 > |
< 은적암의 숲 > |
< 은적암의 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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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지와 연결된 섬 항대도와 굴양식
우리나라 해안에는 조수간만의 차로 육지와 연결된 섬들이 매일 모세의 기적을 일으키는 곳이 많다. 물론 여수반도 일대에도 그런 곳은 많지만 전통적으로 이런 곳을 목섬(項島) 또는 음(音)을 따서 항도(項島)라고 부르고 경남 남해군 남면에 이런 섬을 항도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항촌이라고 하는 곳이 있다. 이곳도 항대도 혹은 목대섬이라 불리는 섬과 앞의 마을은 항대마을 혹은 목대마을이라 불린다.
약 50m의 거리를 두고 분리되어있는 이곳은 밀물 때는 섬이 되지만 썰물 때는 마을과 연결되어 경운기나 차량이 다닐 수 있고 주변은 석화를 생산하는 굴 밭이었다.
주변에 많은 굴 판매장을 들어가 굴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질문해보니, 일하다 중지하고 정말로 친절하게 알려주는 모습이 정감 있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금봉리일대는 굴양식의 중심지로 바다에 널려있는 굴양식장의 모습이 장관이다. 주로 고정식 말 목을 높이 1.5m 폭1.5m 길이 15m로 설치하여 가리비 패각이나 성장한 굴 패각에 종묘를 붙여 1년 바닷물의 조수간만의 차에 담가두면 상품이 된다.
요즘은 1㎏에 5000~6000원의 가격이 형성되었고, 11월부터 구정 때까지가 굴을 먹는데 가장 좋은 시기라고 한다. 이곳에는 찬바람을 막을 수 있는 비닐 안에서 굴을 구워먹는 집들이 즐비했으며 길가에는 산처럼 높은 굴 껍질이 쌓여있었다. 그 많은 굴 껍질을 어떻게 처리할까 궁금하여 마을주민에게 확인해보니 대부분 돈주고 버린다고 하는데 다른 곳에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아쉬웠다.
< 신복리 예고 굴양식장 > |
< 폐굴처리 > |
< 금봉리 굴양식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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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리비 폐각 > |
< 항대 육계도 > |
< 항대 육계도 주변의 굴양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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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철소 흔적들
철은 현재 우리생활에서는 뼈와 같은 역할을 하는 물질로 필수적인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주로 흙이나 나무를 재료로한 물건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 시대의 철은 특수한 용도 즉 군사용이 대표적이다. 전라좌수영이 위치했으며 왜적과의 싸움이 빈번했던 여수는 여러 지역에서 철을 생산한 흔적이 발견된다. 이곳의 철은 지금과 같은 철광석을 재료로 한 제철(製鐵)이 아니고 모래나 흙에 섞여 있는 철(鐵)의 가루를 모아서 제철을 했는데 이것을 사철(砂鐵)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흔적은 여수시 봉산동 일대로 전라좌수영 고지도에 사철(沙鐵)이라 표시가 되어있고, 현재에도 제철과정에서 발생되는 부산물인 슬래그(마을 주민은 '쇠똥'이라 함)가 발견되기도 한다. 길 건너의 봉강동 일대에서 철분이 포함된 모래를 가져와 사용했다고 하는데 마을노인들의 증언과 각종 문헌을 통해 제철소가 있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하는 곳이다.
아쉽게도 이번 답사 중에는 이 지역을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돌산읍 둔내리의 또 다른 제철소 흔적을 찾아가 보았다. 돌산읍 둔내리의 중앙초등학교 앞 길 건너에는 고인들이 모여있는데 이 주변에 '쇠똥'이라 불리는 제철의 슬래그가 쉽게 눈에 띈다. 1989년 돌산초등학교 김영훈 교감이 발견해 나중에 광양제철소에 감정을 의뢰해보니 여수시 봉산동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성분을 가진 것으로 사철을 이용해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아직은 이곳의 제철소에 대해 어떤 기록도 없고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지금도 주변을 살펴보면 밭에 흔하게 '쇠똥'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 돌산 중앙초등학교앞 야철지일대 > |
< 야철지의 '쇠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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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의 봉수대
봉수(烽燧)는 횃불과 연기로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기에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각종 상황을 전달하기 위한 통신수단이었다. 봉(烽)은 밤에 불빛으로 수(燧)는 밤에 연기로 신호를 하는 것으로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여수일대에 왜적이나 긴급한 상황을 발생시에는 사람이나 말(馬)로 알리는 것보다는 빠르고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남해안의 끝에 위치한 여수는 몇 곳에 중요한 봉수대가 남아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돌산면 금봉리 봉화산 봉수대와 화양면 봉화산 백야곶 봉수대이다.
조선시대 주요한 봉수선은 함경도 경흥 서수라(西水羅)ㆍ경상도 동래 다대포(多大浦)ㆍ평안도 강계 만포진(滿浦鎭)ㆍ여수 돌산의 방답(防踏 금봉리 봉화산)등 5곳을 기점으로 서울의 남산을 종점을 연결되었다. 특히 돌산의 방답 봉수는 남해안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직봉(直烽)의 출발점으로 의미가 크다. 이곳에서 출발한 봉수는 화양면 백야곶 봉화산→고흥→장흥→강진→완도→영암→해남→무안→나주→함평→영광→부안→옥구→양성→양천 개화산→서울 남산에 도착했다고 한다.
주로 남해와 서해안의 변방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던 이 봉수선의 흔적을 보기에 가장 적당한 곳은 화양면 봉화산이다. 물론 돌산읍 봉화산 봉수도 출발의 의미가 크지만 빠른 시간에 접근하기는 좀 어려움이 있어 이번 답사때 직접 방문하지는 못했고 지도에 봉수라는 마을이 언급된 곳까지 가서 멀리서 관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동네 노인에 의하면 산의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어려서는 올라가 보았다고 하는데 마을에서 그렇게 멀어 보이지는 않았다.
화양면은 인근의 돌산에 비하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이곳 여수일대의 보통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여수에서 뻗어나간 산줄기가 오른쪽으로는 돌산으로 왼쪽으로는 화양읍으로 향했는데 백야도 건너기 전에 솟아오른 화양면 장수리에 370m의 봉화산 정상에 봉수대가 위치한다. 서쪽으로는 고흥 팔영산과 남동쪽으로는 돌산의 방납봉수와 응하는데 흔히 이곳을 '백야곶 봉수'라고 하는데 '백야'의 명칭은 이곳이 앞의 백야도를 왕래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섬이름을 따서 붙이고 '곶'은 육지에서 바다로 돌출된 부분을 뜻한다.
이곳에 오르려면 원포에서 가축을 기르는 길가의 독립가옥의 뒤쪽에 저수지 방향으로 나있는 작은 임도를 따라 오르면 정상 밑에 다다르게 되고 그곳에서 계단을 올라 능선을 조금 가면 봉화대가 위치한다. 봉화대에서는 주변의 화정면의 섬들과 멀리 고흥, 돌산 그리고 뒤로 눈을 돌리면 화양면의 산과 평야가 보이는 정말로 장쾌한 조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잘 정비된 봉화대가 서있다. 이곳에는 봉수군 10명과 오장(伍長) 2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다시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산전마을로 해서 화동리로 향하게 된다. 주로 비포장의 이 길은 차로 올라가면 아주 스릴 있고 급경사의 길이 아찔하지만 이곳을 여행하는 여행자는 꼭 한번 들려보기를 권한다.
< 봉수마을과 봉화산 > |
< 봉수마을과 봉화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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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야곶 봉수대 > |
< 봉수대에서 본 백야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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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를 지켜주는 돌장승 벅수
이번 답사전에는 마을 앞에 수호신처럼 서있는 장승은 나무로만 만드는 것으로 알았는데 여수일대를 돌아보면서 돌장승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전국에 장승유적이 약 167개소가 있는데 이중 전남이 54개소(석장승 37개소, 목장승 17개소)가 있으며, 여수반도 지역에는 14개소에 석장승이 25기가 분포되어있다고 한다. 이것은 이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어업과 해양문화, 왜적과의 대립으로 인한 군사문화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장승은 경계의 표시'이정표' 마을 수호신 등의 기능을 갖으며, 북부지방에서는 ㆍ더승ㆍ더신ㆍ 중부지방은 ㆍ장승ㆍ 충청지방은 ㆍ수막살이ㆍ수구맥이ㆍ 호남과 영남에서는 ㆍ벅수ㆍ벅슈ㆍ법수ㆍ미륵ㆍ 제주에서는 ㆍ하르방ㆍ으로 불려졌다. 암ㆍ수를 짝으로 부락이나 사찰의 입구 길 양편에 세우는데,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과장되고 왜곡시켜서 수호신의 이미지로 상징성을 담도록 제작되었다.
머리에는 관모(冠帽)를 쓰거나 수군의 투구모양의 모자를 쓰기도 하고 혹은 아무것도 쓰지 않은 것도 있으며, 몸통에는 「남정중(南正重」「화정려(火正黎)」라는 명문을 새겨놓는다.
이 글귀는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사마천의 <사기>에서 나오는 글중 ㆍ전옥은 중(重)을 南正으로 명하여 하늘을 맡아 신을 다스리게 하고 , 려(黎)를 火正으로 명하여 땅을 맡아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으로 보아 南正과 火正은 중국 고대의 관명이며 重과 黎는 사람의 이름이었다는 뜻이 된다.
결국 중국의 고대사에서 시작된 남정중ㆍ화정려가 우리의 무속에 들어오면서 마을이나 군대의 귀신의 침입과 유행병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수의 돌장승은 진남관 마당과 선소유적지, 돌산읍 군내리 서외마을, 돌산읍 우두리, 화양읍 화동리, 화양읍 고내마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말없이 마을입구에서 부정한 것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주며 주민들에게 위안을 주었을 벅수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자연과 왜적의 침입에 시달리며 살아온 여수사람들의 마음의 위안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제주의 하루방처럼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기를 바란다.
< 돌산읍 우두리 벅수 > |
< 돌산읍 우두리 벅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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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양면 화동리 벅수 > |
< 화양면 용주리 벅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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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특산품/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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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와 특산품
여수의 먹거리는 다른 호남지방과 마찬가지로 다양하고 푸짐하다. 조금 이름난 식당을 찾아보면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다양한 먹거리 와 반찬에 감동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최고의 특산품은 돌산의 갓김치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불행하게도 지금도 갓김치가 맛있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하겠지만 누구나 돌산을 찾으면 구입해 가는 특산품이 갓김치이다.
겨자과의 한해살이풀인 갓은 중국이 원산지로 현재는 한국과 일본에서 널리 재배되는데, 향기와 단맛이 있고 적당한 매운맛이 있어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먹으면 톡쏘는 맛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여수 돌산지역의 갓은 따뜻한 해양성 기후와 풍부한 유기질 토양에서 자라서 맛과 향이 독특하고 섬유질이 적고 잎과 줄기에 잔털이 없으며 단백질 함량과 비타민 AㆍC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동의보감>에 "성질은 따뜻하며 맛은 약간 맵지만 무독하다. 그 따뜻하고 매운 맛으로 인체의 담을 제거하여 기(氣)의 유통을 돕고 한(寒)을 몰아내고 속을 따뜻하게 하니 신장의 사기(邪氣)가 제거되며 구규(인체의 아홉가지 구멍)를 통하게 한다."라고 기록되어있다고 하며, 눈을 밝게 하고 기를 하강시켜 속을 따뜻하게 하여 냉, 대하치료, 머리와 얼굴의 풍(風)을 예방 치료하는 등 다른 지역의 특산물과 마찬가지로 만병통치약과 같은 식품이다.
돌산 갓은 과거 수요가 여수지역으로 한정되어 가격이 떨어지고 재배기술의 미숙으로 단위생산량이 적을 뿐만 아니라, 봄과 가을에만 재배되어 주민들에게는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주지는 못했었다. 1991년 주민들이 갓특품사업단을 조성하고 1992년에 돌산읍 죽포리에 농협에서 갓김치공장을 설립하면서 전국적으로 홍보하게되어 수요가 급증하였고, 재배기술의 향상으로 연중생산이 가능하고 병충해가 없어 재배하기도 수월하였다.
원래 돌산의 특산 갓은 적색 갓으로 향과 매운맛이 강해 김치를 담그고 일주일 정도 지나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적색 갓은 사라지고 적색 갓으로 담은 김치도 생산되지 않는다. 현재는 모두 일본에서 들여온 청색 갓이 재배되고 청색 갓은 매운맛이 덜해 김치를 담근 후 곧바로 먹을 수 있는데 어쩌면 지금의 입에 맞을지는 모르지만 전통의 갓김치 맛을 보아온 사람들은 아직도 매운 적색 갓이 진정한 돌산의 갓김치라고 이야기한다. 이곳 농협의 갓김치공장은 물론이고 향일암근처 등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청색 갓으로 담근 갓김치를 판매하고 있다.
현재 돌산읍에는 3개의 갓김치 공장이 운영되며 이중 1곳을 농협에서 직접 운영한다. 농협의 갓김치 공장에서는 우체국 택배를 통하여 전국에 통신판매를 하는데 3㎏에 17,000원, 5㎏에 27,000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여수전체에서 갓은 한해 약 150억 정도의 생산액을 가지고 그중 김치로 생산되는 액수는 약 20억 정도라고 한다. 김치로 생산되면 다른 김치에 비해 1.5~2배의 가격으로 판매되지만 갓의 생산가격에 비하면 부가가치가 높은 편은 아니라고 한다.
지금도 돌산의 관광지 앞 가계에서 갖은 양념으로 붉게 버무려내는 갓김치를 쳐다보며 군침을 삼키며 서서 처다보던 관광온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생각이 난다. 물론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도 맛 볼 수 있지만, 여수에 가서 붉은 땅에 서서 푸른 바다를 보면서 하얀 밥에 붉은 색을 칠한 초록의 갓김치를 올려 먹어보는 것도 아름다우면서 강렬함이 느껴지는 색채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밖에 바다에서 생산되는 해산물과 젓갈 그리고 건어물과 일부 식당에서 맛볼 수 있는 40여가지 반찬의 한정식, 겨울에 비닐하우스 안에서 굴 껍질을 까면서 맛보는 굴 구이 등 모든 것이 넉넉하다.
축제
여수는 시기별로 다양한 축제가 열리며 그중 여수적인 의미가 가장 큰 축제는 매년 5월 4일에 열리는 진남제이다. 진남이라는 이름은 여수시에 자리잡은 진남관에서 나왔으며 진남(鎭南)은 임금의 입장에서 보면 남쪽 즉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 "남쪽을 진압하라" 또는 "왜적선을 침몰시켜라"하는 뜻이 강한 말이다.
5월4일은 이순신 장군이 1592년 5월 4일 전라좌도를 넘어 영남지역에서 첫 출전하여, 11번의 해전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서 임진왜란의 일대 승리를 잡게되었는데 첫출전일을 기념하여 5월3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5일간의 축제가 열린다. 축제의 내용은 충민사에서의 고유제, 자산공원의 충무공동상ㆍ무명수군 위령탑ㆍ충혼탑 참배, 해군사열식, 군점식, 서제식, 가장행렬 등이 다양하게 진행된다.
1월의 한해를 보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시점에 해돋이로 유명한 돌산의 향일암에서는 향일암 일출제가 펼쳐지고, 3월말 진달래가 절정일 때 열리는 영취산 진달래 축제는 공업단지로 삭막해 보이는 흥국사 뒤편의 예로부터 영험한 산으로 알려진 영취산일대에서 산신제를 중심으로 각종 부대행사가 3일간 열린다. 음력 4월 20일에는 검은 모래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만성리 해수욕장에서 모래찜질체험이 실시되는데 이날은 모래가 눈을 떠 찜질효과가 가장 높다는 날로 알려져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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